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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에 바란다 4> 연합뉴스를 찾는 사람들

작성자
KONAC
작성일
2018-08-10 16:13
조회
535
그래요, 선망 받는 직업이지요. 네, 기자, 뉴스를 생산하는 일말입니다.

동서남북을 발로 뛰며 새로운 소식을 캐어내어 다시금 동서남북으로 널리 알리는 일. 때론 밝은 마음의 기쁜 소식을, 때론 무겁기 그지없는 펜을 들어 슬픈 소식을, 그리고 때로는 불의에 맞서 세상 거짓에 맞서 떨리는 손으로 총칼에 맞서 펜을 높이 들어, 오로지 정론직필만을!

고대 이래 숱한 역사가들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매체의 탄생은 근대에 들어서부터라고 할 수 있으니, 기자는 근대의 개막이래 가장 역동적이고 가장 의미 있는 직업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기자 선생’ ‘기자 양반’이라는 자연스런 호칭도 그런 가운데 생겨났겠지요.

그런 만큼 기자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훈련 과정도 혹독하지요. 일선 경찰서 출입기자 시절의 ‘사스마리’며 ‘뻗치기’ 정도로만 표현할 수 없는 고단함, 하지만 그 바닥에는 사명감이 있기 마련이지요. 진실을 향한, ‘팩트’를 향한, 그리고 하나 더, ‘야마’를 향한. 개가 사람을 물면 없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생긴다는 ‘야마’.

사실 충격적이었습니다. 얼마 전 존경받는 한 정치인이 스스로를 저 세상 멀리 던졌을 때, 야마를 찾던 한 언론은 그를 태운 응급차를 추격하며 생중계했습니다. 보도의 선정성을 뛰어넘어 언론 포르노를 보는 듯했습니다. 이건 무슨 ‘야마’ 수준도 아니고, 아예 기자가 개를 문 격입니다. 어디 이 사건뿐이었겠습니까? 우리 국민들은 종종 보아왔습니다. 개가 사람을 무는 뉴스도, 언론이 사람을 무는 소식도, 아니, 물어다가 아예 주인 앞에 가져다 놓고서 꼬리를 흔드는 모습도.

기자라는 직업, 선망받는 만큼의 무거운 짐

단지 그 언론이 속한 집단의 독특한 성향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요? 선망 받는 기자 직업의 한켠, 특종과 낙종 사이 숱한 시소를 타며 받는 일종의 증후군은 아닐까요? 혹여 사스마리 시절의 호기와 패기, 사명감이 흩어진 그 자리에 무언가 다른 것이 비집고 들어선 까닭은 아닐까요? 혈기 충천한 일선 기자에서 칼럼 꽤나 쓰는 차장이 되고, 데스킹을 보다 논설위원, 편집국장의 위치를 넘나보는 사내 정치지형 속에서 당장 차장 직함을 달고 나니 ‘사시(社是)’를 무시하기 어려워진다는 이야기, 종종 들었습니다.

그나마도 연합뉴스는 이러한 고충에서는 많이 자유로울 것이라 믿습니다. 특정 성향의 사주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지요. 하지만 늘 경계해야만 합니다. 언론에 대한 자본과 권력의 간섭은 때론 사주의 사시 이상으로 더욱 강렬하기 마련이니까요.

세계는 사실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끊임없는 연관 속에 있습니다. 끊임없이 움직이기도 하지요. 그런 가운데 ‘팩트’란 어떤 의미일까요?

역사학계에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면서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고 주장한 독일의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1795~1886)가 있습니다. 이와 달리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주장한 에드워드 H. 카(1892~1982)도 있지요. ‘있었던 일’인 사실을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라 평가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강조한 것이지요.

언론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있습니다. 주지하시다시피 객관주의 보도를 둘러싼 논쟁이지요. 재미난 것은 객관주의 보도 원칙이 가장 큰 비판을 받았던 시점이 1950년대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미국 전역을 공산주의 타도의 소용돌이로 몰고 간 매카시 상원의원이 객관주의 보도에 집착하는 언론을 교묘히 이용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고 갔기 때문이지요. 당시 사실에만 충실했던 언론은 객관적 보도라는 미명 하에 매카시즘의 확성기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오명을 쓰게 되었지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여론에 보태고 싶어 하지만, 지배적인 여론이 자신의 견해와 다르다고 판단되면 침묵해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 출신 언론학자 엘리자베스 노엘레 노이만(1916∼2010)이 1974년에 발표한 ‘침묵의 나선 이론’이지요. 이유는 간단하지요. 고립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저자거리 노변한담 수준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 믿고 싶습니다만 작금의 몇몇 모습을 보면 우리네 미디어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껴져 걱정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언론은 왜 사실을 취재해서 널리 알리려 하는 걸까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어떤 기준으로 사실을 선별하고 또 평가하는 걸까요?

지루하고도 두서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저 단 한 가지만 말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선망의 직업, 그것은 가슴에 빛나는 훈장도, 어깨 으쓱할 견장도 아닙니다. 어쩌면 시대라는 무거운 짐이자, 역사에 대한 빚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더욱 멋진 연합뉴스를 기대합니다.

최강문 작가, 전 <말>지 기자